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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국가부도의 날: 공감력 있는 소재로 쌓아올린 어색한 구성
    문화생활/영화리뷰 2018. 12. 3. 01:34

    영화 <국가부도의 날>을 관람평.

    한국 사회의 모습은 1997년 외환위기와 IMF 구제금융을 전후로 상당히 다른 모습을 가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환위기 이전의 한국은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었고 조만간 선진국의 문턱에는 진입할 것으로 예상되는 나라였다. 이 시기에는 미래에 대한 낙관적이고도 나름 낭만적인 분위기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더 나은 미래가 있을 것임을 누구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1997년을 전후해 찾아온 외환위기와 IMF 구제금융 사태를 거치며 한국 사회에는 실업과 해고, 비정규직, 부도와 같은 단어가 낯설지 않게 되었다. 일부 선택받은 자들만이 위기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았고, 위기는 대다수 국민들에게 막심한 피해를 안겼다. 사회 분위기는 냉혹해졌으며 더 이상 낭만은 없었다. 

    외환위기가 발생하고 21년 쯤 지난 2018.11.28일 개봉한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기원인 1997년을 정면으로 다룬 최초의 영화다. 20여년 만에 처음으로 외환위기를 영화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위기의 진행과정과 배경, 그리고 여러 인간 군상의 대응 방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측면을 관심있게 잘 담고 있는 재밌는 영화다. 외환위기의 영향을 받지 않은 국민은 없을 정도로 한국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외환위기를 다룬 영화라는 점에서 <국가부도의 날>은 대중들에게 엄청난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호소력 있는 영화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동시에 영화에서 군데군데 어색한 짜임새와 다소 성급한 마무리가 있어 영화에 대한 몰입과 전체적인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부분도 존재한다. 그렇지만 앞으로 <국가부도의 날>에 대한 여러 비판 위에서 앞으로 1997년 외환위기를 다룰 여러 영화들이 더 나은 성취를 얻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면서, 몇 가지 점을 비판적으로 리뷰한다.

    영화 속, 어색했던 장면들

    1. 먼저 어색한 장면들로는 한국은행 총재를 총장으로 바꾼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설마 영화 제작자가 한국은행 총재 직함을 혼동했을리는 없을 것이고, 영화속 인물과 현실에 대한 직접적 대응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호칭을 비튼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면서도 IMF 총재는 그대로 총재로 호칭하는 것을 보면 이런 각색에도 일관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2. 아무리 급한 상황이라고 해도 한시현과 같은 팀장이 한국은행 총재실(영화속에서는 총장실) 문을 벌컥 벌컥 열고 들어가는 일은 상상할 수 없다.

    3. 재정국 차관(당시에는 재정원 차관)은 사실 한국은행의 팀장보다 훨씬 높은 직책이다. 일단 총재와 팀장이 같은 곳에서 같은 팀으로 일하는 경우도 상상하기 어렵지만, 한국은행의 팀장이 재정국 차관, 경제수석 등과 같이 대책팀에서 활동하는 것도 부자연스럽다. 만약 재정국 차관과 경제수석이 포함된 대책팀이 꾸려진다면 한국은행에서는 부총재가 참여하는 게 자연스럽고 아무리 넓게 잡아도 부총재보(이사)나 국장급은 되어야 한다. 한시현 팀장의 뛰어난 능력과 도전적인 캐릭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영화적 상상력이 많이 들어간 부분으로 생각된다.

    몰입을 떨어지게 하는 캐릭터 설정

    영화의 여러 장면이 지나치게 설명적이다. 가령 한시현(김혜수)이 한국이 부도를 맞게 될 것을 설명하는 장면에서 그 대상자가 경제수석과 재정국 차관 등 경제 전문가임에도 불구하고 롤오버를 풀어서 설명하는 장면도 있고, 윤정학(유아인)이 프레젠테이션을 하며 여신의 용어를 설명한다든지 국가부도의 원리를 도식화해서 설명하는 장면도 다분히 설명조다.

    윤정학의 캐릭터가 종잡을 수 없게 그려진다. 그는 라디오의 사연에서도 국가부도를 예견하는 천재적인 인물이면서, 난파선에서 먼저 빠져나가 돈을 벌겠다는 물신주의를 지닌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막상 부자가 됐다고 좋아하는 류덕환의 뺨을 때리면서 '돈벌었다고 좋아하지 말라'는 엉뚱한 대사를 뱉는다. 윤정학은 영화 속 다른 등장인물인 한시현, 갑수와의 접점도 없기 때문에 중심이 되는 이야기 진행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인상을 주는 캐릭터다.

    재정국 차관은 인간미가 떨어지고 지나치게 냉혹하다. 그는 외환위기야 말로 한국을 전혀 다른 사회로 만들 기회라고 외치고 있는데, 일반적인 공무원들이 지닌 사명감은 전혀 찾아볼 수 없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한시현은 IMF의 협상태도를 돌리기 위해  '투자자들이 제일 무서워 하는 것은 채무자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는 것이다'라고 말해놓고는 정작 하는 일은 보고서를 작성하고 이를 기자들 앞에서 폭로하는 것이었다. 본인의 주장과 직접적인 관련을 찾기 힘든 엉뚱한 대책을 내놓은 것이다. 또한 자신의 오빠인 갑수가 처한 경제적 위기에 대해서 아무런 경고나 조언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설정도 부자연스럽다. 차라리 한시현과 갑수가 남매지간이 아닌 것이 더 자연스러웠을 것 같다.

    그나마 갑수는 경제 위기속에서 가장 큰 피해를 당하고, 고통받는 캐릭터를 처음부터 끝까지 잘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 후기를 보면 그의 캐릭터가 지나치게 신파적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당시 여러 국민들이 받았던 모습을 대변하는 데는 무리가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영화에서 아쉬웠던 부분들

    경제전문가 중에서도 돌이켜보면 IMF의 경제 처방은 지나치게 냉혹한 수준이었고, 부작용이 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영화에서도 IMF에 대한 이런 비판적 시각을 극대화 시켜서 주제로 차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령 주인공인 한시현 팀장이 "IMF는 답이 아니에요", "잘못하면 벌을 받는 것은 맞는데, 여기는 잘못하면 죽여버리는 곳이에요"라고 말하는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대사와 같이 IMF를 악으로 규정하고 무조건적으로 회피해야 하는 대상으로 규정짓는 태도는 너무 나간 것처럼 보인다. IMF에 대한 선악구도에서 벗어나 조금 더 세심한 분석적 접근이 있었다면 더욱 경제 전문가로부터도 공감을 받을 수 있었을텐데 아쉽다. 

    또한 정부와 언론, 잘해주는 사람을 포함해 '누구도 믿지 말라'는 태도는 윤정학과 갑수의 입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확인되고 있는 영화의 중요한 메시지다. 당시 무능했던 정부와 언론, 그리고 여러 방관자들에 대한 비판은 당연히 필요한 것이겠으나, 그렇다면 사회의 신뢰는 어떻게 구축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의심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합리적 의심의 수준을 벗어나 음모론을 주장하거나 거짓뉴스를 퍼나르는 행위의 폐해와 한 사회의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 필요한 막대한 비용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영화의 엔딩 직전에 국민들의 금 모으기 운동으로 모인 금은 대기업의 부채를 갚는데 쓰였다는 문구도 반론의 여지가 있다. 설령 그런 주장을 하고 싶었다 하더라도 자막으로 처리할 것이 아니라, 영화 안에서 에피소드로 녹여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각 주인공들의 20년 후의 모습을 보여준 영화의 마무리는 여러모로 아쉽다. 투자의 귀재가 된 윤정학의 캐릭터는 여전히 예측불가의 모습이다. 한시현이 현재에서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도 불명확하다. (어느새 가계부채 전문가로 일하게 된 것인지...) 외환위기가 발생한지 20여년이 지난 현재도 자칫하면 경제위기가 발생할 수 있으니 미리미리 조심하자는 이야기인 것으로 추측은 되지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이 영화의 주제의식이 무엇인지 잘 전달되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어땠을까

    영화에서는 한시현이 IMF는 물론이고 재정국 차관으로부터도 공격을 받아 안팎으로 고립무원인 상황이었는데, 한시현은 몇 번의 반격기회에서도 번번히 밀리는 듯한 모습을 보여 아쉬움을 자아냈다. 한국의 관료들로 구성된 협상팀과 IMF의 협상과정에서 한국과 IMF의 치열한 논리와 수싸움이 좀 더 전개됐다면 갈등이 좀 더 고조될 수 있었을 것이다. 영화 <변호인>에서의 송우석 변호사의 롱테이크로 진행되는 변론 장면이 인상깊었던 것처럼, 한시현 팀장의 뼈때리는 일갈을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

    국민들의 금모으기 운동 장면을 영화 속에서 간접적으로 보여줬다면 좋았을 것이다. 위기 속에서 가장 고통받는 것도 국민이고,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해 가장 먼저 힘을 모으는 존재들도 국민이라는 영화의 메시지가 더욱 부각되고 선명해졌을 것이다.

    윤정학과 같은 위기 투자자들의 등장은 경제위기를 다룬 이 영화에서 색다른 느낌의 재미를 줄 수 있는 매력적인 소재였을 것이다. 윤정학이 돈을 버는 전략은 크게 세 가지로 소개된다. 1. 환율이 치솟을 것에 대비해 달러화를 많이 사들인다.(한국 원화 숏포지션) 2. 금융자산 가격의 하락 상황에서 돈을 버는 구조의 풋옵션 계약을 체결한다.(한국 주식 숏포지션) 3. 부동산 급매물이 나왔을 때 이를 싸게 거둬들인다.(한국 부동산 롱포지션)

    엄밀히 말하면 1번과 2번 전략은 한국의 원화와 금융자산의 가치(가격) 하락에 베팅하는 숏 포지션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고, 3번 전략만 시장의 공포심리와 투매로 인해 과도하게 가격이 하락한 자산을 보유하여 시장 분위기가 안정되었을 때 이익을 보는 롱포지션이다. 사실 투자 시점만 다르게 가져간다면 위기상황에서 모두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전략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20여년 후에 윤정학을 부동산 투자의 귀재로 묘사하기 위해서 부동산 관련 전략을 일부러 집어 넣을 것으로 보인다. 차라리 한국의 자산가격 급락을 노린 숏 투자자로 일관되게 묘사했으면 대중이 그의 캐릭터를 이해하기 쉽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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