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영화]버닝:수수께끼 세상의 슈뢰딩거의 고양이 찾기
    문화생활/영화리뷰 2018. 5. 20. 03:20

    2018.5.19일 버닝을 보다. 재미도 재미지만 전공에 따라서도 각자 다양한 분석을 시도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영화다. 또한 여러 차원으로 해석이 가능한 복잡한 영화다. 여러 해석 중에서 버닝을 보는 하나의 실마리를 정리해보았다. <스포 주의>

    공허한 세계, 흔들리지 않는 진실은 존재하는가

    영화 <버닝>의 세계는 공허하다. 흔들리지 않는 진실은 없고 확정되지 않은 사실과 가능성만 존재한다. 종수는 소설을 쓴다. 소설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대한 지어낸 이야기다. 그 자체로 세상에 대한 메타포임과 동시에 실체가 없는 것이 소설이다. 그러나 종수는 습작을 한다고만 하지 막상 어디 내놓을만한 소설 하나 썼다는 소식이 없다. 소설도 실체가 없는 것인데 막상 소설 자체도 없으니 그 공허함이 배가 된다.

    해미는 판토마임을 즐긴다고 하는데 거짓말을 감쪽같이 하는 해미의 성격과 유사한 놀이가 바로 판토마임이다. 실체가 없는 사물들을 몸의 동작들로 간접증명하는 행위가 바로 판토마임이기 때문이다. 영화 후반부에서 해미의 손목시계와 고양이는 해미의 죽음에 대한 간접증명, 즉 판토마임으로 작동한다.

    영화에서 우물의 존재를 찾아나서는 전개도 꽤 인상적이다. 해미는 자신이 어렸을 때 자기집 앞 우물에 빠진 사실이 있다면서 그 때 종수가 구해줘서 나올 수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막상 종수는 이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겠지만, 종수는 해미가 어렸을 때 우물에 빠졌는지 진실을 찾아 나선다. 해미와 자신의 관계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확고한 기초를 확인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종수는 이미 허물어진 해미의 집터에도 가보지만 여기서 우물의 흔적은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이장님도 여기에 우물은 없다고 말한다. 종수는 해미의 가족도 찾아가보지만 그들은 우물은 애초에 없었고, 그런 일이 있었으면 자기들이 왜 몰랐겠냐고 반문한다. 누구의 기억 속에서도 해미의 집의 우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해미가 거짓말을 한 것일까? 

    그러나 어느날 종수 엄마가 홀연히 등장하고, 그녀는 모두의 기억과 달리 해미네 집에 마른 우물이 하나 있었다고 기억한다. 사람들의 진술이 어긋나는 상황. 우물은 있었을 수도 없었을 수도 한 양가적인 상황이 된다.

    과거에 우물 하나가 있고 없는지 밝히는 게 뭐 어렵냐 싶었겠지만, 사람들의 기억과 증언에 의존하는 방식으로는 진실에 다가갈 수 없다. 사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대부분이 이런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식과 능력의 한계로 인해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우물 안에서 세계를 구성할 수밖에 없고, 자신이 보고 아는 것이 진리인 양 믿으며 산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해미의 고양이는 확실히 슈뢰딩거의 고양이에서 따온 것 같다. 살아있는 상태와 죽어있는 상태가 중첩되어 존재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마찬가지로, 해미의 고양이는 실제로 있는 것일 수도 아니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일 수도 있는 상태로 존재한다. 해미는 자기가 고양이를 보일러 안에서 주워왔다고 주장하고 자폐증이 심해서 보이지 않는 것일뿐이라고 종수에게 말한다. 그러나 해미의 방 안에서 단 한번도 고양이 모습이 보이기는 커녕 울음소리도 없다. 건물 주인 역시 이 원룸에서는 고양이를 키우지 못하게 한다고 말한다(물론 해미가 몰래 키워왔을지도 모른다). 고양이 배설물과 줄어드는 사료로 인해 간접적으로 해미가 키우는 고양이가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으나, 정황일 뿐이다. 해미의 고양이는 그 자체로 존재와 부존재가 중첩된 상태인 것이다.

    영화 속 해미 역시 자신이 키운다고 주장하는 고양이와 같은 처지로 변한다. 어느날 갑자기 해미는 사고를 유추하게 만드는 전화 통화만을 남겨두고 연기처럼 사라진다. 연락이 전혀 닿지 않는 그녀는 죽었거나, 아니면 어딘가에서 연락을 끊고 살아 있는 경우로 존재할 것이다. 이것이 상식적인 판단이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해미는 삶과 죽음이 중첩된 존재다. 누군가에게 그녀의 시신이나 그녀의 살아있는 모습이 관찰되기 전까지 그녀는 세상에서 살아있으면서 죽은 것이다. 영화 속에서도 언급되지만 동시 존재다.

    해미를 열렬히 사랑하는 종수는 처음에는 명징한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 노력한다. 가장 의심스럽고 해미와 연락이 닿을 수 있는 사람인 벤을 미행하며 해미의 흔적을 찾기 위해 뛰어다닌다. 그러나 벤은 해미의 죽음을 암시하는 듯한 묘한 말들만을 남기며 종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러나 이런 벤의 대사들은 사실 자백도 아닐뿐더러 메타포일 뿐이다. 종수의 말대로 세상은 수수께끼 같다. 그 어떤 것도 확고하지 않고 진실은 알 수 없다.

    믿고 싶은대로 본다

    영화는 종교적인 메타포 또한 여러 번 보여주고 있다. 벤이 자기가 요리를 하는 이유가 자신의 제물을 만들고 먹을 수 있다고 언급하는 장면, 종수가 성당에 찾아가는 장면이 그렇다. 우물을 찾아나서는 과정도 종교적 믿음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다. 우물의 존재를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에 주목해보자. 

    종수는 그 자신은 우물에 대한 체험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해미의 가족 앞에서 마치 자신이 현장에 있었던 것 마냥 이야기를 술술 풀어낸다. 관객들은 알겠지만 그가 내뱉는 대사는 모두 해미의 것이다. 종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해미의 고양이의 끼니를 걱정한다. 이쯤되면 비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가?

    우리라고 다르지 않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있었다는 사실, 지구상에 공룡이 살다가 멸종했다는 사실, 우주가 빅뱅이후 계속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떤 기초에 근거하여 믿고 있는가? 본 적이 있기 때문에, 보이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아도 믿을 수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한복음 20:29)

    종수는 벤의 집 안에서 발견된 해미의 것과 같은 것으로 보이는 손목시계와 벤이 키우기 시작한 고양이의 존재로부터 벤의 범행을 확신한다. 시계와 고양이 모두 정황증거일 뿐이다. 그러나 종수는 이때부터 자신이 믿고 싶은대로 세상을 보기 시작한다.

    그러나 사실 해미의 손목시계는 벤 뿐만 아니라 해미의 동료도 비슷한 것을 갖고 있었고 종수는 이것을 똑똑히 목격한 바 있다. 그리고 한 번도 해미의 고양이를 본 적도 없는 종수가 자기 멋대로 벤의 고양이를 해미의 것이라고 단정할 권한은 없다. 애초에 보일이라는 고양이가 없었을 수도 있지 않나. 이런 점에서 보면 종수의 확신과는 달리 해미의 죽음과 삶은 여전히 중첩되어 있다. 관찰되기 전까지 확고한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벤의 고양이를 '보일아~'라고 부르며 고양이에게 명명하는 행위는 이 영화에서 상징성이 큰 장면이다.[각주:1] 중첩된 세계에서 벗어나 종수는 결정론적인 세계로 진입한다. 관찰을 통해 그 이전까지의 불확실성은 제거되고, 확정된 사실만 남는다. 이제 그의 수수께끼가 풀린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은 종수 자신의 주관적 관념 속에서만 확고한 실체를 갖고 있다. 그의 세계에서 확정된 사실은 아래와 같다.

    • 해미는 어렸을 적에 집 근처의 우물에 빠졌고 자신이 해미를 발견해서 구출할 수 있었다. 해미는 보일이라는 이름의 고양이를 키우고 있었고 그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지만 실제로 그 방안에 존재했다. 벤의 집에서 종수가 목격한 손목시계와 고양이는 모두 해미의 것이다.

    그 전까지 아버지 탄원서 말고는 글도 써본적 없는 종수는 이제 해미의 방 안에서 글을 거침없이 써내려간다. 그리고는 자신이 어렸을 때 해미를 우물에서 구출했듯이(비록 그 사실 자체에 대해서 기억하는 바는 전혀 없고 오로지 해미에게 들은 내용이 전부이지만), 이번에도 해미를 위해 벤에게 복수를 하기로 결심한다.

    버닝의 결말을 보는 방식

    영화 버닝이 열린결말이라고 말하는 것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는 거리가 있다. 

    영화 <버닝>은 해미가 죽었는지 아니면 살았는지, 벤은 살인마인지 무고한 피해자인지와 같은 결정론적 세계관에서 가능한 물음을 요구하지 않는다. 확고한 진리를 찾는 것은 인간의 능력범위 안에서는 본질적으로 무의미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차원이든, 관념론적인 의미에서든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중첩된 상태, 본 영화의 표현에 따르면 동시존재의 오묘함을 충분히 느끼고 즐기면 그 뿐이다.

    진실을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증언자인 벤이 그의 포르쉐와 같이 활활 타오르면서, 사건의 진실은 미궁으로 빠진다. 이 세상에서 진실은 확고하지 않으며, 진리는 인간이 담보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모든 돌다리를 두드려 보고 걸을 수는 없다. 사실과 정보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살기 위해선 종수처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우리는 모두 종수다.

    1. 김춘수의 시 "꽃"과도 일견 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본문으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