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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언어의 온도 : 본질의 발견
    문화생활/책 리뷰 2017. 11. 12. 11:38

    언어의 온도(2016) 이기주 저

    언어에도 온도가 있을까?

    우리의 언어에는 말과 글이 있다. 말에서는 온도가 어렵지 않게 느껴진다. 어투나 목소리, 강약과 빠르기, 높낮이 변화를 통해서 상대의 감정과 심리상태, 그리고 의도까지 읽을 수 있다. 36.5도 사람의 몸을 타고 나오는 목소리를 통해 그의 체온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글에도 온도가 있을까? 물론. 존댓말, 반말, 끝맺음, 각종 문장부호는 물론이고 책을 이루고 있는 종이의 재질과 감촉, 두께, 향기 모두 글의 온도를 만들어내는 재료들이다.

    책 <언어의 온도> 첫 페이지를 펴면 작은 글자로 이렇게 쓰여있다. [본문 곳곳에 스며 있는 잉크 무늬는 디자인적인 요소입니다. 창작자의 의도를 너른 마음으로 헤아려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잉크 무늬까지 의도를 가지고 섬세하게 배치할 정도로 이 책의 작가 이기주는 꼼꼼한 사람이다. 이성적인 차원에서의 철두철미함을 말함이 아니라, 감정과 생각을 전달하는 데 있어서 어떻게 하면 언어의 온도가 최소한의 열손실로 전달될 수 있을지를 진지하게 고민했던 작가라는 느낌이다.

    책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우선은

    책은 가공없이 주어진 그대로의 것을 읽는 것이 가장 좋다. 어떤 부연설명이나 외부 각주, 전문가의 첨언을 보지 않고 책은 그 자체로 작가와 편집자의 의도를 만끽하며 읽어야 최선이다. 글과 장의 배치 순서, 글씨체와 책의 물리적 크기 모두 작가가 생각한 최선의 방식이다. 따라서 일단 책은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독자는 그 느낌을 우선은 받아들여야 한다. 

    고전을 읽다보면 느끼는 것이지만, 해설집이나 요약집으로 접하는 글과 원전에는 큰 괴리가 생긴다. 가령 <일리아드>의 작가 호메로스가 어떤 사람이며, 이야기의 배경은 무엇이고, 어떤 스토리를 담고 있는지를 분석한 글 보다는 고대 그리스 영웅들이 사랑하고 뛰어노는 그 책을 직접적으로 공략하는 편이 훨씬 생생하다. 마키아벨리가 어떤 사람인지 평론한 글을 요점정리로 보기 전에 일단은 <군주론>에 그가 쓴 문장을 먼저 들여다보자. 가공되지 않은 그 순수한 원전이 주는 명료함과 상쾌함. 있는 그대로의 글을 먼저 접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고 또 빠른 길이다. 작가의 생각과 사상에 대한 비판은 그 뒤에 해도 늦지 않다.

    이 책 또한 마찬가지다. <언어의 온도>라는 책이 주는 느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책을 읽는 것이 최선이다. 제3자가 평한 리뷰나 해설을 보기 전에 작가의 의도와 입장을 오롯이 느껴주는 것의 예의다. 리뷰는 그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 그러므로 책을 읽기 전에는 이 리뷰를 읽지 마시라.

    삶의 본질은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가?

    본류, 본질, 근원 등 여러 단어로 소개되고 있지만 이 책을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바로 일상 속 본질의 발견이다.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작가는 직접적으로 추구하고 발견하려 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일상이라는 얇고 반투명한 장막을 통해서 불쑥불쑥 삶의 본질을 의도치 않게 맞닥뜨리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깨달음을 아래와 같이 서술하고 있다.

    좌우봉원이라는 말이 있다. 좌우, 그러니깐 주변에서 맞닥뜨리는 사물과 현상을 잘 헤아리면 근원과 만나게 된다는 뜻이다.(p.23)

    말하자면 근원에 대한 탐색은 중심부가 아니라 오히려 일상과 같은 주변부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삶의 본질을 찾기 위해 그 먼 산티아고 순례길을 찾거나 인생의 큰 역경을 경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근원은 그 속성상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며 일상에서도 느껴진다. 특수하고 한정된 상황에서만 조우할 수 있다면 사실 본질이라고 할 수 없으며 일반적인 상황에서도 불쑥 나타나는 것이 본질이다. 다만 필요한 것은 관찰력이다.

    때론 백지상태에서 아기의 눈으로 바라보세요. 그래야 본질이 보입니다.(p.78)

    본질은 다른 것과 잘 섞이지 않는다.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언젠가 의도하지 않은 순간에 엉뚱한 방식으로 드러나곤 한다.(p.75)

    사소한 대화나 풍경도 함부로 지나치지 않고 곱씹어보고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면서 작가는 끊임없이 의미를 창출해내고 있다. 노인의 푸념도 그의 귀에 들어가면 삶의 지혜와 인생을 담고 있는 명언으로 들릴 지경이다.

    삶의 본질에 대해 우린 다양한 해석을 내놓거나 음미하기를 좋아한다. 헤밍웨이는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으나 패배하진 않는다"고 했고 어느 작가는 "작은 인연과 오해를 풀기 위해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읊조렸다. "우린 다른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영화 대사도 한 번쯤 되새길 만하다.(p.121)

    일상의 본질, 다시 말해 삶의 본질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갖가지 장황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우리 모두 일상에서 제 나름대로의 의미를 발견하고 또 짧은 순간이나마 감동해오며 살아오고 있다. 또, 이것이 우리의 인생을 지탱해주는 힘이다. 

    기주야, 인생 말이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어찌 보면 간단해. 산타클로스를 믿다가, 믿지 않다가, 결국에는 본인이 산타 할아버지가 되는 거야. 그게 인생이야.(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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